Pandemic 시기의 우울증과 불안장애  (4.23.2020)

“Double Depression”: 이미 지속되어온 우울증에 견디기 힘든 외적 상황이 더해져서 환자의 우울의 양상이 격심해지는 것을 두고 임상에서 의사나 치료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Pandemic이 아직도 강력히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이 시점, 우리는 이 COVID-19에 감염되지 않았으나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격리와 고립, 전염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일자리와 돈에 대한 불안은 심리적으로 건강했던 사람들조차도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게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계속 겪어오던 사람들의 경우는 우울과 불안, 공포의 정도가 개인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심한 공황장애를 앓게 되거나 우울과 불안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상황까지도 올 수 있습니다.

Pandemic 이라고는 하지만 정신건강 문제가 왜 그렇게 극심한 양상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고립 isolation’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경향성입니다. 현재 전염을 막고자 외적, 물리적으로 사람 간의 분리와 격리를 시행하다보니 이는 우리 내면에도 분리와 고립의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이 내적 고립 inner isolation은 우리 자신이 기존에 가져온 생각과 감정, 경험 안에 갇히게 되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외부로부터의 객관적 관점과 정서적 에너지의 충전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믿음과 생각, 감정 상태를 반복하면서 부정적인 경향성은 증폭됩니다. 우울과 불안이 해소될 길 없이, 지금 뿐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는 감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심각한 우울과 불안은 심리적인 병증 뿐 아니라 신체적인 병증까지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접촉의 박탈 touch deprivation’이 갖는 영향력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COVID-19의 전염을 막고자 사람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전염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타인’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증가되어 우리 스스로 접촉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면서 인간적인 접촉 touch을 나눌 기회가 극적으로 줄어들고, 타인의 접촉이 발생한 곳은 엘리베이터 작은 버튼까지도 손이 닿는 것을 피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를 보호하려는 조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접촉의 상실은 가장 일차적인 애착, 보호와 친밀함에서 오는 안정성을 약화시킵니다. 아이든 성인이든 이러한 접촉의 부족함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사람을 취약하게 만들어 발달이 지체되고 질병이 생겨나거나 정서적으로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초래합니다.

일례로, 1990년대에 루마니아에서 출산율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아이들의 수 또한 가파른 양상으로 늘어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고아원이나 양육시설의 운영 인력은 한정적이었으니 많은 아이들이 양육자의 신체적인 접촉을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음식과 옷, 살 곳은 주어졌지만 인간적 접촉이 부족했을 때 아이들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표정을 잃었으며 관계에서 위축되고 기이한 반복동작을 보이는 등 발달 장애를 보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발달이 지연되었으며 인지기능의 저하가 두드러지고 심한 자폐증과 같은 양상을 보인 것입니다.

즉 접촉은 사람 간에 안정성, 애착과 보호의 느낌을 전달하는 일차적 근원이기에, 인간적 접촉이 줄어드는 만큼 심리적 어려움과 신체적 증상들도 경과가 나빠진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립과 접촉의 상실이 가져오는 영향을 인식하면서 우리 자신이 현재 이 pandemic 속에서 무엇을 겪고 있는지 보다 잘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위에 생각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겪고 있을 만한 상황을 마음에 그릴 수 있습니까?

그들의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움직여야합니다. 여전히 물리적으로 다가가고 접촉하는 것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삼가야 하지만, 여러 다른 방식을 통해 사람들과의 연결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pandemic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서로를 만나면서도 매우 깊이 소통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통신수단을 사용해서 영상통화를 하고 다양한 형태로 온라인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를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또한 마음을 담은 글이나 영상물, 음악을 메시지나 카카오톡,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전달하는 방법 또한 이런 시기에는 예전과 다른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주위에 심리적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가 있다면 이러한 방법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로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울과 불안 속에서 객관적인 사고능력이 많이 저하되고 정서적으로 짓눌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인 지원 뿐 아니라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알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는 그런 정보를 찾아보려는 의지조차 사용하기 쉽지 않고 정보의 부족은 불안과 우울을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전 세계의 응급상황이 서서히 종료되는 시점이 찾아올 때 우리는 사랑하는 친지와 동료들 또한 고난을 극복하고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전염성 질환이나 그것이 불러온 슬픔과 공포에 파괴당하지 않고 잘 견뎌내어 모두가 다시 일상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감정의 전염성과 충동성   (5.3.2020)


며칠 전 뉴욕 Presbyterian Hospital 응급실을 책임지던 의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현재의 Pandemic으로 인해 기존 환자들의 우울이 심각해지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Dr. Lorna M. Breen의 경우 응급의학과 의사이고 이전에 정신과 병력이 없었다는 점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녀에게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내면의 슬픔과 고통, 또는 지나친 책임감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나 동료들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해석한다면 그녀가 대체로 현실에 잘 적응하고 큰 심리적 어려움이 없었다고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건강하고 노련한 응급의학과 의사가 환자들 치료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녀가 처했던 상황과 환경을 들여다보아야 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 글에서 주목해서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겪는 감정의 전염성과 충동성입니다.

그녀는 최근 수많은 코로나 감염 환자와 그로 인한 사망자를 감당하고 있는 뉴욕의 한 병원 응급실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매일 무엇을 마주했을 지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첫째, 환자들의 불안과 공포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 지, 감염되었다면 경과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치료는 가능한지 등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발열이나 호흡곤란 등의 증세로 병원을 찾고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보였을 것입니다. 의사로서 환자들의 감정의 격동을 진정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그녀는 이 새로운 질환에 감염된 환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숫자에 이르면서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고 구할 수 없는 환자들이 계속 증가하면서 무력감과 죄책감, 인간적 슬픔과 두려움이 누적되었을 것입니다.

세째, 자신과 자신의 팀을 보호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불안, 책임감이 압도적으로 커졌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병원 업무 중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2주 가까이 격리조치를 취한 후 병원에 복귀하기까지 했습니다. 설사 회복되었다고 해도 병에 감염된 것은 그녀를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아무리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사람이거나, 심지어 ‘의사’라고 해도 사람들로부터 전달되는 부정적 감정들—불안, 공포, 우울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런 감정들을 내면에서 해소하지 못한 채로 죄책감과 무력감까지 극도로 커질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한 순간 괴로움이 선을 넘어 의식을 협소하게 만들면 스스로의 생명까지도 끊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정은 강력한 전염력과 충동성을 가집니다. 긍정적인 감정도 그러하지만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감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서로 정서적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문제가 생겨나는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집에 가족들이 두 달 가까이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면서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또 TV를 통해 전염질환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공포 섞인 뉴스를 매일 시청하는 것이 우리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객관적으로 살필 수가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공포와 우울에 누군가가 자살과 같은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했을 때 그에 대해 단순한 논리로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지만, 그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끝내는 행위에 이를 정도 였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었고, 왜 그 상태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게 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치명적인 상태를 초래하는 데에 감정의 전염성과 충동성이 강력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강력함을 이해하면 자신의 감정을 보다 깨어서 살피게 되고, 관계 속에서 서로가 정서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준다는 것을 눈치채고 부정적 자극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칼럼에서 자살에 대한 고찰을 좀 더 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감정의 강력한 충동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William Styron이 개인적 글을 통해 자신이 감추고 있던 우울과 고통이 한 순간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자신을 뒤흔들었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와 와이프는 예닐곱 명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 장소는 뉴욕의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대해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고, 저녁시간이 가까워오면서 정신적 고통으로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그 날 저녁에 집에 머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여전히 마음은 고뇌로 가득할 것이었으므로 신체적인 자아가 어디에 있느냐는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집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나 Primavera 레스토랑에 앉아 저녁을 먹으러 애쓰거나 간에 슬픔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녁을 먹으러 “애쓴다”고 말했는데 나의 식욕은 지난 주를 넘어서면서 생존을 위해서 먹는 수준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 함께 앉은 두 친구는 지난 수년 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맛을 음미할 수 없는 채로 음식만 집어 들었다.

그날 밤에는 어떤 특정한 이유 없이 잠식해 들어오는 운명에 대한 느낌이 강력했다. 그러나 미친 듯한 태연함은 나로 하여금 내면적 참상의 어떤 깜빡임도 알리지 않게 했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적절한 찡그림과 웃음으로 반응했다.

카펫 깔린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가까이에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로 내려가는 길에, 지난 몇 주 동안 날마다 내 마음 깊이에 자리잡아 온 자살의 환상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이 저녁식사 동안 나는 그 환상을 밀쳐 두었다. 이제 이 고통을 스스로에게서 없애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필요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언제?) 나는 그날 저녁 남은 시간 동안 내 상태를 드러내지 않고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절박하게 질문했다.

다시 윗층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나의 비참함을 순간적으로 소리내어 말해버린 자신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상시의 나라면 수치심때문에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나 죽을거야.” 나는 신음하듯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한 남자가 내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내뱉은 그 말은 자기파괴를 향한 내 의지의 가장 두려운 전조 중 하나였다.; 일주일 안에 나는 글을 쓸 것이었다. 의혹에 가득찬 인사불성 상태에서 남기는 유서 말이다.

몇 달이 지나서… 그 날 저녁식사 테이블의 두 친구는 내가 그 때 매우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회상했다. 내가 그 날 보인 엄청난 태연함은 고통의 독특한 내적인 속성이다...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William Styron. An Interior Pain That Is All but Indescribable, Newsweek, April 18, 1994, p.52)